나는 '괜찮지 않은 감정'을 썩 잘 숨기는 사람이었다.
이런 특성은 사소한 것부터 중대한 사안까지 적용됐는데,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할 때나 놀랍도록 무례한 일을 당했을 때도
“네, 괜찮아요.” 하는 소리가 습관처럼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말 괜찮은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내던지느라 숨도 안쉬고 말이다.
나는 예민하고 상처 많은 사람인데, 이런 부류의 슈퍼파워 중 하나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너무 잘 읽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읽히는 즉시 상대방을 복돋기 위한 반응을 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고 오면 에너지가 바닥이 된다.
다른 사람의 감각과 기분을 맞추려면, 나의 감각과 감정을 애써 꾹꾹 억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싫은 사람' 모으는 컬렉터가 따로 없다.
분명 그 사람이 불편하고 싫은데 상대방은 내가 본인을 싫어하는 줄 꿈에도 모른다.
오히려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듯 싶다.
당연한 결과다. 남들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도 또 남 맞추느라 고단한 하루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에
누군가를 만나기 전엔 기쁘거나 설레이기보다는 부담이 몸과 마음을 짓누른다.
그런데 막상 나가면 정신 없이 잘 노는 것처럼 보인다.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방에게 좋은 시간'을 만들고 나면
그들은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한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런 관계들이 빚어낸 작은 말 한마디가 며칠씩 머리속을 맴돌곤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자기 타입이 아닌 사람들을 좋아하는 척 하고 있기 때문에 상처는 옵션(자승자박)이다.
도량이 넓지 않아 잘 넘어가지도 못하면서(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몸이 아플 정도)
막상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맞닥뜨린 순간 못 들은 척하거나 웃고 넘어간다.
수날을 그들의 무례를 곱씹으며 무수히 많은 옐로우 카드를 날리다
어느날 한계에 다다르면 일명 '손절'을 해버리곤 한다. 상대방은 분명 어리둥절 할 것이다.
이런 성격으로 인해 겪은 가장 치명적인 관계는 '시어머니-며느리' 구도가 자아냈다.
손절이 통하지 않는 관계, 뗄레야 뗄 수 없는 이 관계가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게 된 것이다.
어머님은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분으로,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서슴치 않고 독설을 날리고,
감정적 교류보다는 복종과 통제를 원하는 독재자 타입이다.
나는 결혼 전부터 그런 시어머니의 기준에 맞지 않는 며느리였는데,
그만 사랑에 눈이 멀어 어머님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해 버렸다.
(남편의 첫 반항이 나와의 결혼이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어머님을 마주할 때마다 외모, 집안, 학력, 성격, 말투까지 고루 까였고,
상견례 때 아들 자랑만 하고 못 보내겠다며 눈물 흘리기, 결혼식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시댁 본위로 결정하기, 신혼집 어디에 어떻게 하고 살아라까지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어머님의 패악은 계속됐다.
말했다시피 예민하고 도량이 넓지 못하지만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살아온 탓에
어머님께 찍소리도 못하고 마음만 타들어 갔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어머님의 독선이 죄 없는 친정에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한 번은 친정엄마가 시어머니께 '우리 딸 좀 잘 봐주십사' 뇌물겸 토마토를 보냈다.
그러나 평소에도 우리가 드리는 용돈 액수나 선물의 규모가 '너무 작아' 마음에 안든다고 대놓고 말씀하시곤 하던 대쪽같은 취향의 어머님께 가뜩이나 마음에 안드는 며느리 친정에서 보낸 토마토 따위가 마음에 드셨을리 없다.
엄마는 사돈께 토마토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연락을 드렸지만, 어머님은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그러더니 저녁 11시가 다 되어서야 '장례식장에 다녀 오느라 답을 하지 못했고, 부담스러우니 다시는 선물같은거 보내지 말라'고 문자를 하셨단다. 나중에 알게 된 바, 그 날 그런 장례식에 가는 일 따위도 없으셨다.
이런 에피소드가 무수히 쌓이는 중에도 왜인지 어머님을 향해 웃어야 한다고 느꼈다.
여전히 예의 바르고 상냥해야 한다고 느꼈다. 억울하고 슬퍼도 괜찮아야 한다고, 좋은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친정엄마의 태도도 한 몫 했다. 그런 대접을 참을 만한 그릇을 가지지 못한 딸에게
'어른이니 네, 네 해야 한다'라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며느리로서 도리는 다해야 한다'라는 등의 말로 나를 옥죄었다.
그러다 결국 병이 났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픽 쓰러지거나 새벽에 이유 없이 숨이 쉬어지지 않아 응급실에 실려 갔다.
'미주신경성실신' 등의 진단을 받긴 했지만 몸에는 중대한 이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좀처럼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사소한 실수를 반복하며 업무를 마비시켰다.
지하철 트라우마가 생겨 택시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다 팀장님의 권유로 일을 그만두게 됐다.(한마디로 잘렸다)
졸지에 백수까지 되니 미운털은 더욱 깊게 박혔다. '누구 맘대로 그만두냐'라거나 '그 정도도 못참냐'는 말까지 들었다.
무섭고 또 불쌍한 제 엄마에게 져주기를 바라는 '남의 편' 남편과의 신혼생활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어두운 방구석에 앉아 매일 이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지냈다. 시도 때도 없이 병원에 가야 했고 잠을 자면 가위에 눌렸다.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아니, 진짜로 끝나기 직전이었다.
그러다 집값이 고공행진하던 시기에 집을 사야한다며,
끝끝내 도움 받기를 거부하는 내 의사는 철저히 무시하고 집 사러(일부 도움은 주셨지만 대부분 남편 대출로)
방문해 주신 어머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이런 부분이 힘들었고 상처가 됐다고 내 마음을 털어놨다.
결론은 '예민한 너, 정신과에나 가봐라'였다.
웃긴 것은 결과적으로 어머님 말이 맞았다는 것. 살기 위해 무작정 집 앞 정신과를 찾았고 처음으로 살 길이 보였다.
병원은 당시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때라 이제 막 개업한 병원치고도 꽤 한산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은 내게 매번 40분간 무료로 상담을 해주셨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전문 상담을 받으려면
시간당 몇 만원에서 몇 십만까지도 들여야 하는데 절박했던 나를 배려해주셨던 것 같다.
상담 내용은 그냥 두서 없는 넋두리였다. 답답한 마음, 슬픔, 좌절, 그냥 주저리 주저리 늘어놨는데도
선생님은 말 없이 듣고 조용히 내 편이 되어 주셨다. 그렇게 조금씩 '괜찮지 않다'는 감각을 배워갔다.
내가 '괜찮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점차 머리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이 된 어머님의 악의에 다친 마음이 완전히 남인 선생님의 호의 덕분에 치유되어 갔다.
그렇게 4개월여간 상담을 받다 이사를 가게 됐다.
새로운 지역에서 만나게 된 정신과 선생님은 정말 약만 줬다. 그 때부터는 셀프로 마음 공부를 시작했다.
여러 책과 영상을 보며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타인의 잘못 이전에 나의 태도가 불러온 결과임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면서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습관'을 고쳐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치유의 여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시어머니, 남편과의 갈등은 계속 됐는데,
어머님께 기회가 될 때마다 표현도 하고 내 마음을 이야기하려 애썼다.
그러면 어머님은 내가 집안 기둥이라도 뽑아 팔아버린 것처럼 노발대발 하셨고
아버님은 일과 취미로 회피하셨다. 장남이자 골든차일드인 남편은 열심을 다해 나의 모든 시도를 저지했다.
게다가 안하던 짓이라 그런지 처음에는 너무 세게 표현하거나 바보같은 말을 해서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어머님은 이 시점부터 나를 '사사건건 말대꾸나 하는 배운 거 없는 며느리', '며느리로서 도리를 안하겠다는 상식 밖의 인간'으로 여기셨다. 남편은 나를 '어른에게 말대꾸하는 버릇 없는 사람', '그냥 네네 하면 될 걸 일을 키우는 예민한 사람'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어머님과의 관계에서 경계를 세우려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생긴 상태였기 때문에
어머님의 폭언과 남편과의 갈등을 즐기는 경지에 올랐다.
다음편에서
🌿
당신의 감정은 잘못이 아닙니다.
감정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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